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닛타 요시사다 (문단 편집) == 호쿠리쿠에서의 말년과 최후 == 미나토가와 강 전투 후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남조군은 아시카가 군세로부터 교토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이마저도 저지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침으로써 히에이 산에서 하산하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의 가신 [[호리구치 사다미츠]]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우리 닛타 집안의 충의를 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우리 일족 전원의 목을 베고 가 주소서”라며 이를 저지했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황위를 츠네요시 친왕에 양도하고 친왕과 다카요시 친왕(尊良親王)에 지휘권을 위임한 후 하산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로 향해 에치젠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곧 고 모로야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 모로나오의 동생이다.] 시바 다카츠네가 이끄는 아시카가 군에 포위되었다. 닛타 요시사다, 요시스케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소마야마 산성 성주 우리우 다모쓰와 함께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친왕과 닛타 요시아키는 자결, 츠네요시 친왕은 추포되어 교토로 호송되었다. [[파일:external/m1.daumcdn.net/?fname=http%3A%2F%2Fcfile23.uf.tistory.com%2Fimage%2F030B0B345109D266116A8F?.jpg]] 동년 여름이 되자, 닛타 요시사다는 세를 회복한 후, 시바 다카츠네와의 사바에 전투에 승리해 에치젠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 엔겐 3년/겐무 5년([[1338년]]) 윤 7월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선 헤이센지 승병들이 농성하는 후지시마 성을 우익 군으로 공격하게 하고, 구로마루 성에서 원군으로 가세하기 위해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불행히도 닛타 요시사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태평기》에서는 닛타 요시사다가 탄 말이 활에 맞아 고꾸라졌고, 왼발을 안장에서 빼려는 찰나에 미간에 활을 맞아 요시사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고 적고 있다. 닛타 요시사다가 이곳에서 전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사실로 보기 어렵고,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죽음에 힌트를 얻어 《태평기》의 작가가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닛타 요시사다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고, 그가 가마쿠라 막부 공격 때 노획한 세이와 겐지의 가보 [[히게키리]](髭切)[*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노 미츠나가가 만들게 했다는 [[일본도]]로 히자마루라는 일본도와 함께 미나모토 가문의 중요 보검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토의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요 문화재이다. 칼의 길이는 약 81 cm이다.]도 아시카가 가문 손에 넘어 왔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에도 시대인 [[1656년]] 이 전장터에서 경작하던 가헤(嘉兵衛)라는 농민이 투구를 발견하여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미츠미치에게 헌상했다. 투구의 장식으로 보야 꽤 높은 신분의 무장이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돼 감정하였고, 그 결과 닛타 요시사다의 투구로 여겨 마쓰다이라 가문이 보관하였다. 메이지 유신 후, 닛타 요시사다를 모신 후지시마 신사가 창건될 때,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이 신사에 헌납하였다.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돼 보관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